[ 고 대 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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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흥시의 전신인 소래읍· 수암면· 군자면지역은 본래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|
63년(475)에 수암면· 군자면은 장항구현(獐項口縣), 소래읍은 매소홀현(買召忽縣)이라 했다가, |
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(553)에 신라의 영토가 된후 제 35대 |
경덕왕 16년(757)에 장항구현은 장구군(獐口郡)으로 매소홀현은 소성현(邵城縣)으로 개칭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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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 고 려 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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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려시대의 장구군은 태조 23년(940)에 안산현(安山縣)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제25대 충렬왕 |
34년(1308)에 문종(文宗)의 출신지라하여 안산군(安山郡)으로 승격되었고, 소성현은 모후(母后) |
인예왕후(仁睿王后)의 출신지라하여 경원군(慶源郡)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인종때에 이르러 |
모후 순덕왕후(順德王后)의 출신지이므로 인주(仁州)로 되었다가 공양왕 2년(1390) |
경원부(慶源府)로 승격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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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 조 선 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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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선시대의 안산군은 세조 9년(1463) 강희맹(姜希孟)선생이 중국 남경의 전당지(錢塘池)에서 |
연꽃씨(蓮子)를 가지고 귀국, 하중동 208번지에 소재한 관곡지(官谷池)에 심은후 널리 퍼져 |
세조 12년(1466)부터 별호(別號)를 '연성(蓮城)'이라 하였다. 경원부는 태조 1년(1392) 인주로 |
환원되었다가 태종 13년(1413) 인천군(仁川郡)으로 개편되었고, 세조 6년(1460) 세종의 비인 |
소헌왕후(昭憲王后)의 외향이므로 인천도호부로 승격 되었으나 숙종 14년(1688)에 인천현으로 |
강등되었다가 숙종 24년(1698) 다시 인천도호부로 환원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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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 근 대 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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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천도호부는 고종 32년(1895)에 인천부로 개편된 뒤 이듬 해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. |
1910년에 일제가 강점하자 4년뒤인 안산군은 1914년 3월 1일 부·군·면 통폐합에 따라 과천군과 |
함께 시흥군에 흡수 통합되면서 군내(郡內) · 초산(草山) · 잉화(仍火)의 3개면은 '수암면(秀岩面)' |
으로, 와리(瓦里) · 마유(馬遊) · 대월(大月)의 3개면은 군자면(君子面)으로, 인천부의 신현(新峴)· |
전반(田反) · 황등천(黃等川)의 3개면은 부천군 '소래면(蘇萊面)'으로 되었다. 그 뒤 1936년 4월 |
1일 서울의 확장책에 따라 영등포읍의 영등포리 · 당산리 · 양평리와 북면을 서울시에 넘겨 주었고, |
1949년 8월 14일에 동면의 구로리 · 도림리 · 번대방리가 서울시에 편입되어 시흥군으로 분리 |
되었다. 이어 1963년 1월 1일에 동면의 시흥리 · 독산리 · 가리봉리 · 봉천리 · 신림리와 신동면 |
의 전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되자 화성군 일왕면의 9개리가 편입되면서 의왕면(儀旺面)으로 개칭 |
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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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73년 7월 1일 안양읍이 안양시(安養市)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자 부천군 소래면이 |
편입되었으며 1979년 8월 10일 반월지구출장소(현 安山市)가 개소되자 수암면 · 군자면의 |
13개릭 분리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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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81년 7월 1일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'광명시(光明市)로, 1982년 6월 10일 과천면이 |
과천출장소(현 果川市)로 되었고, 1980년 12월 1일 의왕면은 의왕읍으로 소래면은 소래읍으로 |
승격되었으며, 1983년 2월 15일 소래읍 옥길리 일부는 광명시에, 계수리 일부는 부천시에 |
편입되었다. 1989년 1월 1일에 군포읍이 '군포시(軍浦市)'로, 의왕읍과 동부출장소가 '의왕시 |
(儀旺市)'로 소래읍 · 수암면 · 군자면이 '시흥시(始興市)'로 각각 승격 되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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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 승격이후 1991년 1월 15일 중림 · 연성출장소가 개소된 뒤 이해 9월 1일에 중림출장소는 |
중림동(重林洞)'으로, 연성출장소는 '연성동(蓮城洞)'으로 각각 승격되었다가 이듬해 신관동이 |
신현동(新峴洞)'으로, 중림동이 '과림동(果林洞)'으로 각각 변경되었다. 이어 1994년 7월 1일에 |
거모동이 군자동으로 개칭되었고 이듬해 4월 20일에 수암동 · 장하동 · 장상동과 화정동의 너빌 · |
고주물 지역이 안산시에 편입되었으며, 1995년 11월 15일 법정동인 무지동이 무지내동으로 개칭 |
되었는가 하면, 1999년 9월 27일에는 정왕동이 정왕1동과 정왕2동으로 분동되고, 2002년 3월 |
2일에 다시 정왕3동과 정왕4동으로 분동되었고, 2003년 12월 23일에는 정왕1동이 정왕본동과 |
정왕1동으로 분동되어 현재 시흥시는 14개 행정동에 30개 법정동으로 편제되어 있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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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 명칭유래 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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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흥(始興)이라는 명칭은 현재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을 중심으로 한 일원의 지역이 고구려 |
장수왕 63년(475)에 잉벌노현(仍伐奴縣), 신라 경덕왕 16년(757)에 곡양현(穀壤懸), 고려 태조 |
23년(940)에 금주(衿州)로 불러오다가 조선 태종 13년(1413)에 금천현(衿川懸)이라 하였고 정조 |
19년(1795)에 정조가 부왕(父王)인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고려 성종 |
때(991) 금주의 별호명을 취해 시흥현(始興懸)이라고 개칭한데 유래한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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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 시흥의 뜻 ]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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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흥의 고구려 시대 지명인 잉벌노(仍伐奴)의 뜻부터 풍이하면 잉(仍)'은 '내(乃)'와 통용하여 |
느'의 음차이며, '벌(伐)'은 음(音) '벌'로 'ㅂ'을 음차한 것으로 'ㅁ'과 와전한다. 그리하여 仍伐 |
늠'으로 느리 늘-늣-는-늠의 음전(音轉)으로 연장(延長)을 뜻한다. 신라시대 지명인 곡양(穀壤)은 |
곡(穀)의 훈(訓) '낟' 양(壤)의 훈 '내'로 '늣내'의 훈차라 하겠다. 결국 '잉벌노'는 '늠내'를 한자로 |
표기한 것으로 '뻗어가는 땅'이란 뜻인데, 고려 때 별호를 조선 정조 때 행정지명으로 택한 |
시흥(始興)'과 같은 뜻을 지닌 '넓은 땅(廣野)'을 의미한다. 지명에 걸맞게 시흥은 서울의 영등포구 · |
구로구 · 금천구 · 관악구 · 동작구 · 서초구 등과 경기도의 안양시 · 광명시 · 안산시 · 과천시 · 군포시 |
· 의왕시 등을 분가시켰으니 우리 선조들의 탁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. |